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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의 글

선택의 시대/이어령

샬롬이 2013. 11. 4. 00:11

 

 

 

 

선택의 시대

 

 

 

/이어령

 

 

 

입시 경쟁이 자아낸 볼펜 문화의 특성은 결국 창조적 사고보다는

선택적 사고를 발전시켜 온 것이라 할 수 있다.

창조적 사고니 선택적 사고니 하면 공연히 이야기가

 어려워지고 막연해지지만, 쉽게 말해 엉뚱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줄어들었다고 하면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그 대신 건전한 상식과 임기응변의 순발력

그리고 1분 만에 한 문제씩 찍어 내려가는 머리 회전으로

 이미 제시되어 있는 문제를 변형하고

 선택하는 능력은 날로 눈부신 빛을 발하는 것이다.

 

우선 요즈음 대학가의 젊은이들을 한 세대 전의 대학생과 비교해 보면

그것이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심각하고 형이상학적인 의미를 내포한 이야기를 주고받기보다는

현실 풍자적인 유머, 단답식처럼 짤막한 경구,

기지의 유행어 같은 데서 더 많은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른바 요즈음 유행하고 있는 대학가의 웃음은 도저히 옛날 학생들이나

기성인들이 따를 수 없는 재치를 보여주고 있는 것들임에 틀림없다.

교수의 머리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그나마 그 웃음을 만들어내는 지성은 창조성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시험 문제처럼

 주어진 테두리 안에서 엮어내는 선택적 기술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예를 들자면 끝이 없겠지만 우선 술을 나타내는 은어들을 놓고 생각해 보자.

젊은이들은 소주를 소니워커라고 하고 막걸리를 이순신코냑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기지는 모두 서양 술 이름을 변형시켰거나 그 발상을 따온 것이다.

나폴레옹코냑이 있음으로 해서 비로소 이순신코냑이라는

 말의 웃음과 효과가 생겨난다.

문학 약식으로 치면 패러디에 해당하는 지성인 것이다.

 패러디적인 지성이야말로 사지선다형 인간이 발휘할 수 있는

최대의 무기로서 기존적 텍스트인 한자 성어나 속담 같은 것을

패러디화한 것이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설왕설래說往說來가 설왕설래舌往舌來로 되어 키스한다는 뜻이 되고

귀거래사가 귀중한 것을 거래하는 곳, 즉 전당포를 뜻하는 말이 된다.

고부간의 갈등은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싸움이 아니라

고고를 출까 블루스를 출가의 갈등으로 변조된다.

 

 

다음과 같은 속담의 패러디에서도 똑같은 발상을 엿볼 수 있다.

'가다가 중지하면 간 것만큼 이익이다."

"길고 짧은 것은 대봐도 모른다(고무줄)",

"서당개 3년이면 보신탕감이다" ,

"아랫물이 맑아야 세수하기 좋다",

"가는 말이 거칠어야 오는 말이 곱다",

"개천에서 모기 난다",  "고생 끝에 골병든다",

"아는 길은 곧장 가라", '제비 다라 강남 간다(복부인)"....

속담의 뜻을 뒤엎거나 말이나 소리를 바꿔쳐서

 의외적 효과를 내게 하는 패턴을 응용하면 수없이 많은 패러디를 만들 수 있다.

일견 참신하게 보이면서도 그러한 동일수법으로 엮어지는 웃음들은

기계적인 또 하나의 획일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기성인들의 구호 문화를 뒤집은 것이

바로 젊은이들의 이러한 말놀이라고 할 수 있다.

내용은 정반대라 할지라도 사고의 뿌리는 같은 것이다.

면면히 흐르는 호흡이 긴 사고, 주어진 것을 넘어 현실과 역사를 굽어보는

 초월적 사고, 이런 것들이 패러디의 웃음이나 분노 앞에서 보면

세련되지 못한 그리고 촌스러운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사지선다로 상징되는 신한국인들의 발상 양식은

반드시 학생 문화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라.

입시 경쟁을 한 사람들은 사회에 나와도 그 사고의 밑뿌리는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사지선다식 선택지는 민주주의의 기본 의식이 되는 것이다.

선거란 결국 입후보자의 이름 밑에 O표를 치는 볼펜 문화가 아니겠는가.

그것은 주어진 것 가운데서 하나를 고르는 명확한 판단적 지성을 요구한다.

 

신한국인이란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선택의 의지와

 판단 능력을 갖추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창조적 능력보다는 여러 가지 것을 놓고 비교하고 판단하고

선택하는 힘 그리고 그것으로 움직여가는 사회 -

그것이 정치적으로 나타나면 민주주의요,

소비 문화에 나타나면 광고 문화가 되는 것이다.

학교를 나오고 시험 경쟁이 끝나도 신한국인은

죽을 때까지 사지선다의 시험 답안지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 <젊은이여 한국을 이야기하자>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