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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의 글

젊은이여, 한국을 이야기 하자/이어령

샬롬이 2013. 10. 2. 11:51

 

 

 

 

젊은이여, 한국을 이야기 하자

(가을을 기뻐하라)

 

 

/이어령

 

 

 

 

 

 

 

많은 사람들이 가을에 사색하고 독서를 하는 것은

오래된 하나의 습관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그런데 가을을 느끼고 생각하는 것에도 사실은

민족성과 한국 문화의 영향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단순히 개인의 느낌이 아니라 가을을 맞이하는 이 감상에는 한국의 문화,

우리 문화의 한 자락 바람이 스치고 니나간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특히 요즘 재미있는 실험들을 많이 하는데

인간의 두뇌는 좌측과 우측이 서로 다르다고 합니다.

왼쪽 뇌는 따지고 분석하고 추리하는 과학적 능력이 있고,

오른쪽 뇌는 느끼고 뭔가 감정을 표현하는 감성의 기능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왼쪽이 발달한 사람은 대단히 지적이고 분석적인 데 비해,

오른쪽 두뇌가 발달한 사람들은 아주 감정적이고 감성적 인간이라는 겁니다.

가을을 느끼는 데 있어서도 서양 사람들은 좌측 두뇌로 느끼는 데 비해,

동양 사람들은 주로 우측 두뇌로 느낀다는 겁니다.

 

 

 똑같은 가을인데 가을도 왼쪽 오른쪽이 있느냐고 생각할 지 몰라도

실제 실험을 해보면, 서양 어린들과 동양 어린이들을 같이 놀게하고

가을 풀벌레 소리를 들려주면 아무리 도시에서 자란 아이들이라도

동양 아이들은 벌레 울음소리에서 묘한 정감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서양 아이들에게 물어보면 잡음정도로밖에 안 들린다는 거지요.

그러니까 가을 풀벌레 소리나 달빛 같은 것을 보고 묘한 감상과

정감을 느끼는 것은 동양인의 특성이지 서양 사람들은 안 그렇다는 것입니다.

물론 서양에서도 시인들은 오른쪽 뇌가 발달했겠지만,

대부분이 가을을 정감으로 느끼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가을이 되면 우리들은 느끼는 심정을

한국 문화의 특성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전체 문화의 바다, 문화의 강줄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숙명을 느끼게 됩니다.

 

실제 외국 사람들이 만들어낸 이야기인데,

독일의 한국 유학생들이 가을 달이 뜨니까 독일 친구들에게

"우리 달 뜨는 것 구경 가자" 그러니까 "아, 좋아라" 하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은 모두 마찬가지구나, 가을 달을 감상하는 것은

동서양이 차이가 없구나 생각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약속을 해서 자기 친구하고 언덕에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둘 다 삐죽한 것과 길쭉한 것을 들고 왔어요.

달을 보러 가는데 다른 뭘 들고 왔기에 동서양이 다 똑같구나 했다는 거예요.

 

똑같은 달인데도 동양 학생은 달빛과 달의 아름다움을 정서적으로,

감정적으로 느꼈고, 독일 학생은 그것을 과학적, 분석적 관측을 하기게

좋은 달이라고 생각했다는 겁니다. 물론 이것은 한낱 우스개 이야기로

 한 것 같습니다만, 사실은 문명화될수록 인간들의 우뇌보다

좌뇌 쪽이 더 발달하고, 동양인이 서구화되면서

점점 우리의 정감도 옛날과 달라지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가을은 무더운 여름 동안 땀 흘리고 일한 사람들이 수확을 하고

뜨락의 작은 열매들이 익어가는 계절입니다.

그리고 그 열매를 수확하게 되는 계절입니다.

그것이 바로 논밭일 수도 있고 직장 또는 가정에서 여름내 일하던

결실들이 얻어지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가을을 좌뇌로 생각하든 우뇌로 생각하든 철이 지나감에 따라서

한번즘 우리의 삶을, 한국인의 운명을 지그시 생각해 보자는 겁니다.

 

 

** 우리의 전통적인 관습이나 문학작품을 보면

달에 관한 것이 탱양에 관한 것보다 상당히 많은 것 같다.

그렇다면 달과 우리의 전통적인 농경 문화와는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인가?

 

 먼저 가요를 보면 서양에서는 "오 솔레미오" 하면서

 애인을 태양에다 비교합니다.

애인에게 구혼할 때도 "당신은 나의 태양이요"그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신라 향가를 보면 남자인데도 달에 비교하는 것이 참 많습니다.

그 유명한 <찬기파랑가>를 보더라도,

"열침에 나토얀다 조차 가지난디야 새파란 날이여에 기랑이 주시스랴"

하는 것이 있습니다. 물론 여러 가지 방식으로 읽지요.

이두 문자라고 하는 것은 한문음으로 우리나라 말을 옮긴 것이기 때문에

확실하지는 않습니다만 대게 이렇게 읽습니다.

 

현대어로 번역하자면 "흰 구름을 탁 밀치고 나타난 달이" ,

즉 개운월출開雲月出입니다. 불교에서는 구름이 고민을 나타냅니다.

인간의 수심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걸 밀치고서 "환한 달처럼" ,

이 환한 달은 진리의 달입니다. "환한 달처럼 떠오른 달" ,

"저 파란 냇물에 달 그림자가" , 파란 냇물에 기랑이라 하는 것을

화랑을 말합니다. "화랑의 얼굴이 있구나." 아주 고급한 비유입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하늘에는 달이 떴다. 저 흐르는 물에 달 그림자가 어렸구나,

그 달이 기랑의 얼굴 같구나, 이랬을 텐데, 달이 떠간다,

새파란 냇물 위에는 기랑의 얼굴이 떠 있다,

기랑의 얼굴이 바로 달이다, 이렇게 표현합니다.

향가의 일절을 보더라도 신라 사람들이 참으로 대단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끌밋한 남자를 구름을 밀치고 나타난 환한 달에 비교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과거 모든 시가나 문학작품을 보면 해는 잘 안 나오는데

달이 많이 나옵니다. 서양하고 비교했을 때에

우리는 달 문화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좀 딱딱한 이야기 같지만 왜 그렇게 되었는가?

특히 불교에서는 해보다는 달을 많이 씁니다. 이렇게 볼 때,

불교 영향으로 아마도 달이 많이 씌어진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인도는 아주 덥습니다. 태양이라고 하는 것이 밝고 광명을 주기는 하지만

인도 사람들은 해를 좋아하지 않게 되지요. 자기를 막 불태우니까.....

그 대신 밤이 되면 서늘한 달이 뜨니까 좋게 생각했습니다. 

달은 하나지만 온갖 강에는 다 달그림자가 있다.

월인천강月印千江, 달은 하나지만 온갖 강에는 다 달그림자가 있다.

즉 불심佛心이나 부처님 또는 인간의 진리는 하나지만

인간의 마음을 강물에다 비교할 것 같으면

우리 마음속에다 달 하나씩을 가지고 있다.

달은 하나지만 천 개의 강물 속에 어린다. 이런 말입니다.

아주 아름다운 말입니다. 이 모두가 불교가 들어오면서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북방 민족이므로 태양을 좋아했을 법한데

그 후에 불교문화가 들어오면서부터 달을 좋아하게 됐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는 농경 문화와 관계가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 것입니다.

농경 사회란 해보다는 달을 중심으로 해서 계절감을 느끼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어 과학자보고 물어보았지요. 근거가 없다고 그래요.

사실상 시골에서는 윤달이니 조금潮-이니 해서

참 정확하게 계절과 조수가 맞는 것 같아요.

 

과학적인 근거는 없다고 하더라도 달은 인체와 직접 관계가 있습니다.

해는 인체와 관계가 없어요. 뭘 보고 아느냐 하면

달이 뜨면 간만의 차이가 생깁니다.

그리고 특히 여성들은 달의 변화와 몸의 주기적 사이클이 똑같습니다.

태양은 우리에게 많은 빛을 주지만 직접 인간과 대화를 하지는 않습니다.

천체 중에서 제일 사람과 비슷한 것이 달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 참 슬퍼지기도 하고 또 문화라고 하는 것을

깊이 연구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달이라고 하는 것을 왜 우리 한국인들이 좋아했나.

농경민들이 왜 특히 좋아했나 하는 것을 생각하면

해는 밤낮 둥글지만 달은 사람처럼 태어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청장년이 되고 그러다 도 이것이 점점 이지러져서 마지막에 그믐달이 되면

노인이 되어 사라져서 죽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흘 동안 완전히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다시 또 태어나거든요.

인간들은 가족끼리, 사랑하는 사람끼리 살면서도

언젠가는 죽는다는 생각을 할 것입니다.

인간들이 한 번 죽어지면 다시 돌아오지 못하니 참 절망적이었습니다.

그때 뭘 보고 희망을 느꼈느냐 하면 농사를 짓는 사람들의 삶의 태도입니다.

그들은 유목민들과 달라서, 씨를 뿌리고, 그것이 자라서 가을에 떨어지면 죽는데,

봄이 되면 다시 돋으니까, 농사일을 하면서 우리들이 이렇게 농사를 짓듯이

'인생도 끈이 아니다. 죽고 나면 우리는 다시 소생한다.

우리는 몇 배의 열매를 더 거둘 수가 있다' 고 철학적으로 깨닫는 거예요.

 

이것을 거듭나다 해서 재생 사상이라고 합니다.

인간들은 죽음이 끝이 아니라 또다시 되살아난다고 하는

농경적 사고를 했었는데 달이야말로 바로 이런 재생의 기쁨을

우리에게 눈짓해 준 징표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농경 사회에서는 전부 달을 숭상하는데,

뉴질랜드 토착민들의 신화에 참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 신화하고 비슷합니다.

어느 랄 달이 토끼보고 하는 말이 "지상에 내려가서 사람들한테 일러라.

내가 너희들을 사랑하므로 너희들은 한번 지상에서 영원히 사라져도

나처럼 다시 태어나는 영생을 얻으리라. 이렇게 가서 전하라" 했는데

하늘의 사자使者인 방정맞은 토끼가 도중에 그 말을 잊어버렸어요.

그래서 땅으로 내려와 "너희들은 나와 다르므로 한번 죽으면

다시 태어나지 않으리라"고 전했대요 그래서 달은 영원히 계속해서 사라졌다가

태어나지만 인간은 한번 죽으면 돌아오지 못한다는 겁니다.

 

사람은 너무 분했습니다. 토끼가 말을 잘못 전했기 때문에

인간은 죽으면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니 얼마나 화가 났겠어요.

그래서 토끼 입을 찢어놓았기 때문에 토끼 입이 쭉 째졌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근원설화라고 그럽니다만 우리는 어떻습니까?

동양에서는 항아가 불사약을 훔쳐가지고 달나라로 도망갔지요.

항아가 달나라로 도망가지 않았으면 우리가 영생을 얻었을 텐데

그만 몰래 불사약을 훔쳐가지고 달나라로 갔기 때문에 인간은 영원히

살 수가 없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밭에 심은 곡식을 가꾸고

가을이 되어서 곡식을 수확할 때의 그 느낌을 가만히 한번 생객해 보십시오.

 

'곡식은 가을이 되어 열매를 맺고 봄에 다시 탄생한다.

달도 거듭 기울었다 차기를 반복하여 탄생한다.

 인간만 그렇지 못하다. 달처럼 되고 싶다.

가을의 곡식처럼 다시 떨어져 수천 년을 수만 배의 곡식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하는 달에 대한

그리움과 희망, 구제, 이런 것들을 가을철에 가장 많이 생각했습니다.

또 그런 씨가 되고 달이 되고자 하는 그 마음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에

잠깐 머물다 가는 하나의 인간이지만 희망을 가지면서

살았던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것이 농경 민족들이 가졌던 가을의 철학이요, 신앙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강강술래를 보면 손에 손잡고 원을 그리며

죄어들어 갔다가 풀어졌다 하는 것이 마치 간만의 차이처럼, 밀물, 썰물처럼

삶의 즐거움과 괴로움이, 생과 사가 교체되는 달의 체험을

우리의 선조들은 가을을 통해 시와 철학으로 삼았던 것 같습니다.

비록 도시화되고 모든 것이 산업화되어 가지만,

그래도 가을이 되면 한번씩 달을 보고 시를 생각하고

내 삶에서 내 밭에서 무엇을 거둘 것인가를 겸허하게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는 것이 필요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요즘 사람들은 도대체 하늘을 잘 보지 않습니다.

 

언젠가 앙케트 조사를 했더니 '달을 보았습니까?'라는 항목에

안 보았다는 사람이 많고, 보았다는 사람은 '어떤 계기에서 보았습니까? 하는

난에다 텔레비전 안테나를 고치러 갔다가 보았다고 썼습니다.

역시 달 보는 시간보다는 텔레비전을 더 많이 보고 있는데,

한번쯤 텔레비전 스위치를 끄고 가을 달을 묵묵히 쳐다보면서

수천 수만년 전부터 그 달을 바라보던 사람들의 마음 그리고 수천 번 수만 번

되풀이하면서 기쁨과 슬픔과 외로움 속에서 살아온 삶의 긴 여정을

생각해 본다면 조금 더 나의 삶이 가을 들판처럼 무르익고

 풍요로워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