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돌리드 논쟁
/베르나르 베르베르
바야돌리드 논쟁은 최초의 <인권 재판>이었다.
크리스토 콜럼버스가 1492년에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이후로
스페인은 인디오들을 광산에서 노예로 부려 먹고 있었다.
또, 이 <인간과 비슷한> 존재의 몇명 <표본>들은 유럽에 끌려와
마치 서커스의 동물처럼 사람들의 구경거리로 제공되었다.
당신의 카톨릭교회는 심각한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도 우리처럼 아담과 이브의 후손일까?
이들에게도 영혼이 있을까?
이들을 우리 종교로 개종시켜야 하나?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스페인 왕이자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인
카를 5세는 1550년 바야돌리드의 산그레고리오 수도원에서
<전문가>들을 소집하여 인간과 비인간에 대한
정의를 내리기 위한 토론을 벌이게 했다.
인디오도 인간이라고 주장한 이는
도미니크회의 수사인 바르톨로메 데 라스카사스였다.
그의 부친은 콜럼버스와 함께 아메리카에 간 적이 있었고,
바르톨로메 자신은 스페인 사람과 인디오가 협력하는
이상적인 공동체를 카리브 해의 섬들에 건설하려 시도했던 사람이다.
그와 맞선 사람은 신학자이자 아리스토텔레스를 번역한
헬레니즘 전문가이며, 루터의 공공연한 적이기도 했던
후안 히네스 데 세풀베다였다.
이들 외에도 네 명의 성직자와 열한 명의 법학자로 구성된
15인의 위원회가 두 사람의 논쟁을 판가름하기 위해 참석하고 있었다.
이 토론은 경제적으로 결정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때까지 스페인 정복자들이 보기에 인디오는 인간이 아니었고,
따라서 무한정한 공짜 노동력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인디오들을 굳이 개종시키려 하지 않았고
아무런 양심의 거리낌 없이 그들의 부를 빼앗고
마을을 파괴하고 그들을 노예로 만들었다.
그런데 그들 역시 인간이라고 판명된다면 어찌되겠는가?
그들도 기독교로 개종시키고,
그들에게도 정상적으로 임금을 지불해야 하지 않겠는가?
여기서 또 하나의 문제가 재기되었다.
<그들을 개종시켜야 한다면,
설득과 강제 중 어떤 방법을 써야 하는가?>
이 논쟁은 1550년 9월에서부터 1551년 5월까지 게속되였는데,
이 기간 동안 신세계 정복은 잠시 중단되었다.
논쟁은 애초의 쟁점을 벗어나 크게 확대되었다.
세풀베다는 인디오에 대한 간섭의 권리 및 의무를 주장했으니,
인디오들은 식인종이며 인신 공양을 서슴지 않는 데다가
남색 등 교회가 금지하는 각종 성행위들을 자행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또 그들 스스로는 폭군들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서구인들이 군사적으로 개입해 줘야 한다고 말했다.
라스카사스의 생각은 달랐다.
그가 보기에 인디오들이 인신 공양을 하는 것은,
그들이 신을 너무도 숭상하는 까닭에 평범한 동물 공양이나
기도로는 만족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세푸베다는
가치의 보편주의를 내세웠다.
동일한 법이 만인에게 적용되어야 하며,
기독교적 윤리가 야만인들에게도
부과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반면 라스카사스는 상대주의를 제의했다.
각 민족, 각 문화를 개별적으로 연구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의견이었다.
평결은 라스카사스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내려진다.
그리하여 인디오의 영토에 대한 정복 사업이 재개되었다.
한 가지 변화가 있었다면,
그것은 논쟁 중에 세풀베다가 권고한 대로
앞으로는<정당한 전쟁>의 개념에 의해 정당화되지 않는 한
<불필요한 약탈과 잔혹 행위와 살인 행위>는
허용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이 <정당한 전쟁>은 스페인 정복자들이
자의로 해석할 수 있는 너무도 무호한 개념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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