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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의 글

글로벌리즘과 로컬리즘/이어령

샬롬이 2013. 2. 22. 14:20

 

 

 

 

 

글러벌리즘과 로컬리즘

 

- 아시아에 대두하고 있는 민족주의 -

 

 

  그와 비슷한 일이 세게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냉전 후 보스니아를 비롯해 세계 도처에서 일고 있는

지역분쟁의 대부분은 자기 문화의 우월성을 내세우는

 국수주의적 문화와 인종주의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일본의 평화헌법 폐기, 야스쿠니 신사참배, 역사왜곡 문제 등이

한국과 중국을 긴장시키고, 중국의 동북공정이 한국을 불안하게 하고,

  또한 중국의 군사비가 벌써 국민총생산의 3퍼센트 대에 이르고

항공모함을 건조하는 등 일본과의 패권다툼이

일어나는 게 아니냐는 우려를 낳기도 합니다.

 

  여기에 북한의 핵개발도 아시아지역의 먹구름이 되고 있습니다.

유불선의 융합으로 상징되는 아시아 삼국의

모럴 폴리티스(Moral Politics)가 파워 폴리틱스(Power Politics)로

향하고 있는 징후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에 대하여 중국은 '세계 톱'의 자리가 아니라

그 중심을 점하기 위한 다극세계 구축에 있다는 것,

즉 중국은 지배가 아니라 단지 영향력 행사에 있는 것이라고

자신들의 태도를 천명하려고 합니다.

 

 "중국은 중화의 극을 누린 11세기에서 17세기 동안

세계 최대의 함대를 보유했고, 높은 역제력과 기술력을 지니고 있었을 때에도

유렵인들과는 달리 어떤 민족의 문명도 멸한 적이 없었다"며 말입니다.

실제로 후진타오 주석의 신세대 지도자들은 4불정책을 표방하고 있습니다.

패권주의도, 힘의 정치도, 블록정치도, 군확경쟁도 모두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대신 "신뢰관계를 구축하고, 곤란을 완화하고

협력관계를 발전시켜, 대결을 회피" 하는 화합의 정신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4불정책은 티베트 문제를 비롯해 동북공정과

조선족에 대한 경계 등 한민족 중심주의를 강하게 내뿜고 있지요.

 

 

 새롭게 대두하고 있는 국수주의적 경향은 일본의 경우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한국과 중국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일본인의 야스쿠니신사 참배객은 점점 불어나 

이제 그 수가 20만 명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각종 우익단체의 권력행사도 더욱 노골화되어 군보과 군기를 휘두르며

천황주의, 민족주의 등을 찬미하는 구호를 부르기도 했습니다. 

 

아마 오늘의 젊은이들은

우리가 왜 야스쿠니신사에 대해서 신경을 쓰는지

잘 모르는 채 머리띠를 두르는 일도 많을 것입니다.

원래 야스쿠니신사는 일본의 전통적인 토착신앙의 신도와는 다른 것으로,

명치유신의 황실을 상징하는 제국주의의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옛날의 신도는 불교와 습합하여 신불일체로 되어 있었지만

명치유신의 훼불엊책으로 불교와 신도를 분리하고

다시 그 신도를 황실의 신만을 모시는 국가신도로 조작해냅니다.

 

  그래서 같은 일본 사람이라고 해도 황실에 대항한

사쓰마항의 병사들은 야스쿠니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이렇게 배타적인 국가신도는 종교와 정치가 일체가 되어

   이웃나라만이 아니라 자국민까지 속여

가미가제 같은 전쟁의 희생물로 바치도록 한 것이지요.

수상의 야스쿠니 참배는 명치유신의 배타적. 침략적 민족주의의

회귀로  볼 수 있기 대문에 그 피해를 입은

한국과 중국이 반대를 해왔던 것입니다.

 

 민족이라는 신조어

 

  분단국인 한국의 경우는 더 복잡합니다.

최근 북한의 핵문제가 주변국들의 이슈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이 문제에 있어서도 역시 '우리끼리'라는 민족주의 문제가

주변국과의 미묘한 외교문제를 일으키게 됩니다.

분단국가인 한국에서 피는 그 어느 것보다도 짙은 것으로 인식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분단된 현실 속에서는 피의 논리와 보편적 가치인

긴권과 자유의 문제들이 서로 이가 맞지 않아 갈들을 빚게 됩니다.

중국의 동북공정 정책이나 일본의 신사참배니 독도 영유권 주장이니

교과서 왜곡 같은 민족주의 바람이 거세질수록

한국 역시 민족사상은 열기를 더 해갑니다.

  최근의 영토. 역사. 군사문제를 포함한 동북아시아의 긴장과 분쟁은

자민족중심주의로는 해결하기가 힘든 것들입니다.

오히려 오늘날과 같은 글로벌시대의 환경 속에서

서로가 폐쇄적인 민족주의를 고집하면, 우리는 과거 일본이 걸었던

황국주의 시대의 참담한 역사를 되풀이하는 위기를 초래하게 될는지도 모릅니다.

  아시아에서의 반일은 당사자인 일본을 포함해서

과거 일본 천황이데올로기의 국수주의에 대한 경계에서 나온 것이며,

그러한 폐쇄적인 민족우월주의와 인종차별주의의 길을 걷게 되면

어느 나라라도 일본이 패전한 것과 같이 멸망의 길을 걷게 되리라는

교훈을 상기시키기도 합니다.

 

 불행했던 아시아의 패권주의 문화

 

   민족주의가 자국중심의 폐쇄성에서

열린 민족주의로 나가기 위해서는,

그리고 아시아가 공유해온 문화가

더 큰 세계의 보편적 가치로 나가기 위해서는,

젊은 여러분들이 패권 없는 새로운 공존의 역사를 만들어내야 합니다.

  "오, 신비한 힘이여!

   둘이면서도 하나인 동양의 나무 은행잎이여!" 라고

노래한 괴테의 시처럼, 동양의 그 신비한 힘을

21세기 정보혁명의 네트워크를 통해 전 세계에 보여줘야 할 것입니다.

  중화사상이 오늘의 세계 시스템의 모양을 갖추고

 글로벌문화처럼 아시아지역을 석권하던 때에도

한국과 일본은 한자만 사용해 왔던 것이 아니라,

각자 로컬문자인 자국의 한글과 가나를 섞어 사용해왔습니다.

두 글자 체계를 혼용한 예는 지구상에 그렇게 흔한 것이 안닙니다.

그러니까 벌써 우리는 그로컬리즘에 익숙한 역사와

그 전통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것은 곧 문화의 동질성과 이질성을 인정하고

그것을 수용하는 문화적 관용주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시아 문화에 보편성은 있는가

 

 

   앞에서 용 이야기를 했습니다마는

서양에서는 동양과 반대로 용이라고 하면 악을 상징하지요.

그래서 악용(惡龍)을 죽여야만 반드시 아리따운 공주와 결혼을 하는

 '세인트조지 콤플렉스'의 서구문명의 특성이 생겨나기도 했습니다.

그런 서구사회에서도 요즘에는 서로 다른 반대 의미를 하나로 합치는

'포트만토(Portmanteau)'라 불리는 신조어들이 많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인터넷과 관련된 말들이 대부분 그런 것입니다.

'인터렉션'을 토대로 한 지식정보화시대의 특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에듀케이션과 엔터테이먼트가 '에듀테인먼트'로 되고

프로듀서와 컨슈머가 통합하여 '프로슈머'라는 말을 낳게 됩니다.

  롤랑 바르트가 언젠가 고백했던 것처럼 서야문화의 특성은

이항대립체게로 되어 있어 모든 것을 나누고

한쪽을 배제하는 것이 그 특징입니다. either-or의 양자선택에서

중간항을 허락하지 않은 배제의 논리 속에서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하지만 인터넷 네트워크 사회.

디지털혁명의 인터렉션 패러다임 변화 속에서 살아가는

정보사회에서는 매시 업의 매직카드에서 본 것처럼

퓨젼과 크로스오버의 문화현상이 일어납니다.

내뱉는 숨과 들이마시는 두 호흡으로 인간이 살고 있는 것처럼,

문명의 숨결도 일원론이냐 이원론이냐 하는 것으로는 따질 수 없는

'하나니자 둘'인 양의적 관계를 지닙니다.

  개체론에서 관계론으로, 절대주의에서 상대주의로

 패러다임을 전환하면 선형적 놀리가 탈구축되어갑니다. 

소위 컴플렉시티(complexity)라고 하는 복잡과하과 같은

3F(fluctuaton, fractal, fuzzy)로 상징되는

새로운 과학이론들이 모두 그렇습니다.

 

  한반도는 가위이다

 

  지오컬처(geoculture) 입장에서 보아도

 이 양의성을 포함하는 문화적 특성을

가장 많이 지니고 있는 것이 반도입니다.

한반도는 거대한 대륙과 열도로 이루어진 섬나라 사이에

 참으로 작고  위태롭게 끼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반도가 대륙과 섬 사이에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동북아시아의 문화는 결코 오늘 같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중국과 일본이 과연 어떻게 되었겠는가를 상상해보세요.

  강대한 대륙문화와 해양문화 사이에 반은 바다요 반은 대륙인

반도문화의 매개항을 두고 있었다는 것은 동북아문화에 독특하고도

결정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모두 닫힌 주먹과 모두 열려져 있는

보자기의 이항대립 사이에, 반은 열리고 반은 닫힌 가위가 존재하는

 '가위바위보'의 게임과도 같은 것입니다.

 

가위가 있기 때문에 닫힌 구조의 서열적 이항대립 시스템에서 벗어나

변화하고 순환하는 열려진 시스템으로 나가게 됩니다.

동양에서 서양으로 들어갔다는 이 '가위바위보 시스템' 속에서는

적대적인 패자라는 것이 없습니다.

 

   보자기는 주먹을 이깁니다마는 가위에게 집니다.

하지만 가위는 보자기를 이기면서도 주먹에게는 집니다.

여기에 선형논리의 위계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쥐가 이 세상에서 제일 높은 신랑감을 고르려고 하다가

해에서 구름으로 구름에서 바람으로

결국은 벽을 이기는 쥐에게로 돌아온다는

쥐의 결혼설화와 순환구조가 똑같지요.

 

 

실제로 무역균형에 있어서 한중일은

가위바위보의 구조로 순환하고 있습니다.

한국은 중국에 흑자를 내고 일본은 한국에 흑자를 냅니다.

그런데 중국은 일본에 흑자를 내고 있습니다.

  이렇게 대륙과 반도와 섬의 세 가지 지오컬처를 유지하면서

2천 년 이상 살아온 지역은 아마도 동북아를 제외하고는

그 예를 찾아볼 수 없으리라고 봅니다.

그런 조화를 가능케 한 것이 바로 반도문화입니다.

대륙도 아니고 섬도 아닌 반도의 매개적 존재, 물과 불을 상극이 아니라

상생으로 이끌어간 가마솥 같은 역할을 한 것이지요.

 

 

 <젊음의 탄생/이어령 지음/2008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