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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의 글

벌거벗은 임금님 동화를 믿지 말라/이어령

샬롬이 2010. 11. 7. 19:10

 

 

벌거벗은 임금님 동화를 믿지 말라

 

 

/이어령 교수

 

 

  작가 오스카 와일드의 말처럼, 허구의 정신을 상실하면서부터

문학이든 철학이든 모든 것이 재미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실증주의라는 이름 아래에서, 과학이라는 또 다른 종교 아래에서,

우리는 모두가 벌거벗은 임금님이 되어버린 겁니다.

원래 언어텍스트는 보이지 않는 상상의 실로 짠 것으로 실제 직물이 아닙니다.

문화라는 것도 알고 보면 그런 허구의 실로 짜인 화려한 옷감입니다.

   리얼리스트들은 철없는 아이들처럼 언어텍스트가 실재가 아니라

허구임을 밝힘으로써 임금의 추악한 나체를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동화<벌거벗은 임금님>에서는 임금도 ,백성도,

그 말을 한 아이까지도 불행해졌을 것이 뻔합니다.

새로운 사기꾼들이 나타나 보이지 않은 또다른 옷감을 만들어 낼 때까지 말입니다.

안데르센의 리얼리즘은 동화 자체를 죽인 것이나 다름없지요.

동화야말로 허구의 실로 짜인 환상의 옷이니 말입니다.

   시인이 가장 많은 나라는 아이슬란드라고 합니다.

가혹한 자연 환경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실제의 불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상상의 화롯불이 필요하지요. 어설픈 과학이 되어버린 인문학은 다시 허구와

상상력과 그 생명의 불꽃을 되찾아와야 합니다.

   과학적인 분석을 통해 보면 뒝벌 (Bumble bee)의 몸체는

절대로 날 수가 없는 구조라고 합니다. 퉁퉁한 몸집에 비해서 날개가 너무 작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수탉은 어디로 보나 날 수 있는 조건을 모두 갖추었지만 실제로 날지는 못합니다.

뒝벌이 날아다니며 꿀을 따올 때 수탉은 땅속의 벌레를 쪼아 먹으며

네발 달린 짐승처럼 걸어 다닐 뿐입니다.

      대학의 젊은이들은 더 이상 닭이 아니라 뒝벌이어야 합니다.

리얼리즘과 실증주의에 머물지 말고 한걸음 더 나아가야만 역설적이게도 진정한

`삶의 리얼이티`를 펴고 있는 리처드 플로리다는 그것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대학을 재능과 관용의 자석으로 만드는 것 -

대학은 크리에이티브 경제를 움직이는 지(知)의 중심이다.

과학, 사회는 물론 크리에이티브 영역에 있어 최고의 리더십 대부분은

미국의 활기 있는 대학 시스켐을 원류로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리에이티브 시대에 대학이 할 수 있는 것,

대학이 해야만 하는 것에 대해서는 종래의 이해로는 한계가 있다.

과거 20년 동안 대학은 새로운 학문의 기술을 탄생시키는 연구실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인식되어온 것이다........좋은 대학은 세계의 구석구석에서 몰려오는

최고의 재능을 안으로 끌어들이는 놀라운 능력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공부(工夫)의 세 뜻과 젊은이에 바치는 헌시

 

공부라고 하면 초등하교 시절 어머니한테 꾸지람 들으면서 숙제하는 모습을

떠올리기 쉽지만, 입시에 시달린 여러분에겐 아주 지겨운 말이지요.

그런데 같은 한자어인데도 중국에서 공부(工夫)라고 하면

`시간의 여유` 와 `틈` 을 뜻하는 말로 쓰입니다.

그리고 또 일본에서는 무엇을 `궁리` (아이디어)하고 `생각한다`는 뜻이 됩니다.

스터디의 뜻으로 사용되는 우리의 공부와는 아주 다른 말이지요

하지만 세 나라가 제각각 다르게 쓰는 `공부` 의 뜻을 한데 모아보면 젊은이들이

꿈꾸는 공부의 새로운 입체적 개념이 만들어집니다.

그러면 아시아 그리고 세계의 학생들을 능가하는 통합적 지혜를 갖게 되는 것이지요

         시간 여유가 있어야 공부를 할 수 있고, 공부를 해야만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또 생각을 기르기 위해서는 공부를 해야 하고.

공부를 하기 위해서는 한가로운 시간의 틈이 있어야 합니다.

그 인과 관계가 둥그런 원처럼 돕니다.

학교를 뜻하는 영어의 `스쿨(School)` 도 실은 희랍어로 시간적인 틈이나

여가를 가리키는 말에서 나온 것이라고 합니다.

중국어의 공부와 같은 뜻이지요. 참으로 놀라운 동서의 일치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여러분들이 대학생이 되었다는 것은 곧 `공부`를 할 수 있는 짬(leisure)을 -

일생 동안 대학생활처럼 공부에 전념할 수 있는 시간은 두 번 다시 없을 겁니다 -

얻었다는 뜻입니다. 그 시간에 열심히 공부(study)를 하면 여러 가지 공(idea)를

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되는 겁니다.

  한편 `공학(工學)이라고 할 때의 그 공(工)자에 지아비 부(夫)자를 쓴 것이 `공부`이니

곧이곧대로 읽으면 과학도나 엔지니어의 뜻이 될 수도 있습니다.

코펜하겐의 자그마한 맥줏집에 모인 몇몇 물리학자들의 담론으로

보어의 양자론이 탄생한 것처럼, 대학은 놀라운 미래 과학을 낳는

즐거운 비어가든(Beergarden)이 될 수도 있습니다.

    자, 이제 결론을 말하겠습니다. 지금까지의 대학은 지지자(知之者)를 만들어내고

오늘의 대학은 호지자(好之者)를 만들어냈지만,

앞으로 21세기의 대학은 자신의 생 자체를 창조하고 즐기는

낙지자(樂之者)들의 행복한 뜰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젊음은 새롭게 탄생합니다. 젊음은 대학을 낳고 대학은 시대를 낳습니다.

시대는 다시 대학을 낳고 대학은 다시 젊음을 낳습니다.

둥글게 둥글게 앎은 삶으로 삶은 앎으로 순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