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봉지 속에 가득 찬 우수憂愁
/이어령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라는 소월의 아름다운 시구가
요즘 젊은이들의 입으로 옮기면 "엄마야 누나야 간편하게 살자"로 바뀐다.
강변이란 낱말 하나가 소리도 음절도 비슷한 간편으로 변한 것 뿐인데
그 뜻을 하늘과 땅만큼이나 다르다.
그것은 그냥 간편하게 살자는 무슨 신생활 운동 구호가 아니라
다름 아닌 라면을 뜻하는 은어이기 때문이다.
라면과 같은 인스턴트 식품이 얼마나 생활과 밀착되었는가 하는 것은
요즈음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하고 있는 숫자 타령만 봐도 알 수가 있다.
"1 하면 일번지라면, 2 하면 V라면(손가락으로 V자를 쓰면 2자가 되니까),
3 하면 삼양라면, 4 하면 사발면, 5 하면 오향면, 6 하면 육개장,
8 하면 팔도라면...."이라는 노래가 그것이다.
물론 이것은 라면 식품 회사가 만든 종합 광고가 아니다.
'호걸'을 호떡 같은 걸레, '스타'를 스스로 타락한 자의 준말로 풀이하고 있는
우리 젊은 세대들의 반짝이는 기지의 산물이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옛날부터 우리 민중들은
시대의 풍속을 숫자로 나타내는 타령을 즐겨 불러왔다.
그 전통이 라면 시대에도 용케 그대로 이어져
내려온 것은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열녀 춘향이 매를 때리는 숫자에 맞춰 사랑 노래를 부른 것이나,
"1, 일본놈이 2, 이등박문이가 3, 삼천리 강산을 먹으려고...."로 시작되는
식민지 시대의 그 숫자타령과 비교해 보면
시대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밥이란 덤덤한 것이다. 톡 쏘는 자극도 무슨 향기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매일매일 먹어도 물리지 않는다.
그렇기에 꾸밈이라는 것이 없고 패션이라는 것도 없다.
그것은 전통적인 삶 그 자체의 맛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라면은 그 자체가 반전통적인 혼합 문화의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
면은 중국적인 것이고 그것을 인스턴트 식품으로
만든 발상은 미국 문화의 산물이다.
그러나 그것을 상품화하여 시장에 내놓은 것은 일본인들이었다.
라면은 전형적인 잡종 문화의 상징이다. 라면 맛은 바로 튀기의 맛이다.
그렇기 때문에 라면의 특성은 한곳에 붙박여 있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전전해야 된다. 라면의 숫자타령을 보아도
우선 그 종류가 많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쉬 물리기 때문에 끝없이 새로운 유행을 만들어주어야 하고
이것저것을 섞어서 새 튀기들을 만들어 주지 않으면 그 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
그리고 광고의 힘이 아니면 살아가기 힘들다.
쇠고기라면 . 계란라면. 우유라면. 짜스면. 짜파게티. 영라면. 비빔라면 -
그러다가 VIP라면에, 드디어는 올림픽 지정 라면까지 등장하게 되었다.
겉으로 보기엔 종류도 많고 소재도 다양해서 밥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선택의 자유와 개성의 특이성이 있는 듯 싶지만
막상 봉지를 뜯어 맛을 보면 그 맛이 그 맛이다.
다른 것은 단지 포장이요, 그 이름이다. 선택의 자유와 개성의 차이성 -
그 다양성의 철학은 라면이 아니라 우리가 어디서 많이 들었던 말이 아닌가.
그렇다! 학교에서 민주주의 배울 때 듣던 그 말이다.
겉으로 보면 다양성이 있는 듯하면서도 실제로 속 알맹이는
획일주의로 엮어져 있는 우리 사회와 어쩌면 그렇게도 비슷한 것일까.
라면 정치, 라면 사회, 라면 인간....환히 들여다보이는 투명한 라면봉지 속에는
신한국인의 독특한 우수가 들어 있는 것이다.
누구도 우수라고 의식조차 못하는 그 일상의 고독과 가치의 해체가....
'"당신은 이 때 라면을 먹습니까
그리고 라면을 먹고 났을 때 어떤 생각이 듭니까?"
신학국인 조사팀은 이러한 질문을 해보았다.
그 답을 한자리에 그대로 모아놓아도
안톤 슈낙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못지 않은
현대인의 우수를 실감 있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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