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확, 몽마주르를 배경으로 73 X 92cm . 1888년 6월 . 캔버스에 유채 >
삶과 예술의 규칙
/빈센트 반 고흐
태오에게***
완연한 가을로 접어들었다. 비가 오고 으스스하다.
비에 젖어 하늘이 비치는 거리를 배경으로 음영을 드리우며 서 있는
사람을 그리기 좋은, 분위기 있는 날이 계속되고 있다.
그런 장면은 모베가 아주 아름답게 그리곤 했지.
그동안 복권가게 앞에 모여 있던 사람들을 대형 수채화로 그렸고,
해변 그림도 하나 시작했는데, 대략적인 구성을 편지와 함께 보낸다.
자연을 마주했을 때 단조로움을 느끼게 되고,
그래서 자연이 우리에게 말 걸기를 멈춘 것처럼 느껴지는 때가 있다고 했지?
그 말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나도 꽤 자주 그런 느낌을 받곤 하는데, 그럴 때는 완전히 다른 것에 도전한다.
풍경이나 빛이 빚어내는 효과에 지쳤다고 느낄 때면 인물을 그리는데 몰두하고,
혹은 그 반대로 일을 하지. 어떨 때는 그저 그 시기가 지나가기만을
기달릴 수밖에 없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소재를 바꿈으로써
감각이 둔해지는 것을 극복한다.
요즘은 인물 그리는 일에 매료되어 있다.
픙경에 대한 느낌이 아주 강렬해서,
인물보다는 빛의 효과나 풍경의 분위기를 잡아내는
유와나 데생에 빠졌던 때가 있었지. 대체로 인물화가에 대해서는
따뜻한 공감보다 차가운 존경심만 느낄 수 있을 뿐이었지.
그러나 샹젤리제 거리의 밤나무 아래 서 있는 노인을 그린
도미에의 데생(발자크 소설의 삽화)에 큰 감명을 받기도 했다.
그 그림 자체가 그렇게 중요한 건 아니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도미에의 구상이 드러내는 당당하고 남성적인 분위기였다.
바로 그때 받은 감동 덕분에 사소한 세부는 무시하고 뛰어넘게 되었고,
초원이나 구름을 그리는 일보다 인간 존재에 관심을
집중하는 것이 더 훌륭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인간이야말로 우리의 관심을 끌고,
생각하게 만들며, 직접적으로 우리를 감동시키기 때문이다.
영국의 데생화가나 작가들이 그려내는 인물에 매료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월요일 아침에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진지한 열의,
절제된 산문, 분석적인 태도 등은
아주 건실하고 본질적인 것으로, 나약해질 때마다 그것에 의지할 수 있다.
프랑스 작가들 중에는 발자크와 졸라가 그런 사람이지.
조금 전에 작업실 창으로 아름다운 장관을 볼 수 있었다.
종루, 지붕, 연기를 뿜어내는 굴뚝이 지평선 위의 빛을 배경으로
짙고 어두운 실루엣으로 보였거든. 이 빛은 그 너머의 무거운 비구름을
배경으로 번쩍인 섬광에 불과했다.
비구름은 아래쪽으로 갈수록 더 두꺼워지다가, 가을바람이 불어오자
여러 조각으로 흩어지며 사라졌다. 순간적으로 빛이 번쩍했을 때
비에 젖은 짙은 색 지붕이 마을 여기저기서 번들거렸다.
(그림으로 표현할 때는 살색으로 칠하면 그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마을 전체가 같은 색조로 한덩어리처럼 보이는데도,
붉은 기와와 슬레이트를 구분할 수 있다.
비에 젖은 도시 전체의 전경이 순간적으로 드러났을 때,
포플러나무는 노란잎을 휘날리고,
도랑 둑과 초원은 짙은 녹색을 띠었으며,
자그마한 인물은 검은 색으로 보였다.
오늘 오후 내내 석탄 나르는 사람을 그리느라 힘들지 않았다면
그 장면을 그렸을 텐데.... 아직도 낮에 하던 일이 마음에 맴돌고 있고
다른 것을 새로 시작할 여력이 엾는 탓에 다음으로 미루었다.
요즘 네 생각을 자주 한다. 네가 파리의 예술가에 대해 말한 것
(뭇여성들과 자유롭게 어울려 다니고, 남들보다 기분을 잘 내며,
젊은이 특유의 가치를 주장하려는 사람들에 대해 말한 것)은
정말 예리한 관찰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사람은 여기에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일상생활 속에서 신선한 활기를 유지하는 것은
강물을 거슬러 헤엄치는 것과 같기 때문에
여기보다 그곳에서 생활하기가 더 힘들겠지.
파리에서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절망에 빠지겠니.
조용히, 합리적으로, 논리적으로, 그리고 정당하게 절망하겠지.
노력은 존중받을 가치가 있고,
절망에서 출발하지 않고도 성공에 이를 수 있다.
실패를 거듭한다 해도, 퇴보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해도,
일이 애초에 의도한 것과는 다르게 돌아간다 해도,
다시 기운을 내고 용기를 내야 한다.
네가 들려준 사람들의 삶이 엄한 규칙에 따른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을 멸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문제는 추상적인 생각이 아니라 행동에 있다.
규칙은 지켜졌을 때에만 인정받을 수 있고 가치가 있다.
깊이 생각하고 늘 신중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바람직한 까닭은,
그런 자세가 우리의 에너지를 집중하고
다양한 행동을 하나의 목표로 모아주기 때문이다.
내가 말한 사람들도 자신이 하려는 일에 대해
더 분명한 생각을 가졌더라면 의연하게 일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규칙만 나열하면서 어떤 수고도 하지 않고,
심지어 자신이 만든 규칙조차 지키려 하지 않는
사람들보다는 네가 말한 사람들이 낫다.
규칙에 대해 왈가왈부하기만 하는 사람들은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규칙을 통해서도 아무 것도 얻는 것이 없지만,
네가 언급한 사람들은 마음을 다잡고 생각을 하면서 산다면
위대한 일을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위대한 일이란 그저 충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연속되는 작은 일들이 하나로 연결되어서 이루어진다.
그림이란 게 뭐냐?
어떻게 해야 그림을 잘 그릴 수 있을까?
그건 우리가 느끼는 것과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사이에 서 있는,
보이지 않는 철벽을 뚫는 것과 같다.
아무리 두드려도 부서지지 않는 그 벽을 어떻게 통과할 수 있을까?
내 생각에는 인내심을 갖고 삽질을 해서 그 벽 밑을 파내는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그런 때 규칙이 없다면, 그런 힘든 일을 어떻게 흔들림 없이 계속해 나갈 수 있겠나?
예술뿐만 아니라 다른 일도 마찬가지다.
위대한 일은 분명한 의지를 갖고 있을 때 이룰 수 있다.
결코 우연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규칙이 먼저 있고 인간이 그에 따라 행동하는 것인지,
인간의 행동에서 규칙이 추론되는 것인지 하는 문제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문제처럼 규정할 수도,
또 그럴 필요도 없는 문제인 것 같다.
그러나 사고력과 의지력을 키우려고 노력하는 것은
긍정적이고 중요한 일이라고 본다.
요즘 내가 몰두하고 있는 인물화를 본다면 어떻게 생각할지 아주 궁금하다.
여기에도 도하나의 달과 달걀의 문제가 있다.
즉, 미리 성정된 구성에 따라 인물을 그려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각각 따로 그려진 인물을 모아놓으면 하나의 구성을 이루게 되는 것일까?
이 문제는 계속해서 작업하다 보면 결국 같은 것임이 밝혀진다.
네가 지난번 편지의 끝에 했던 말과 같은 말로 편지를 끝맺을까 한다.
네 말처럼 우리 두 사람은 현상의 배후에 숨어 있는 것을 찾아내기 좋아한다.
달리 말하면 사물을 분석하는 경향이 강한 것이지.
그림을 그리기 위해 꼭 필요한 성격이라고 말할 수 있고,
유화를 그리거나 데생을 할 때 장점으로 작용할 수도 있겠다.
어느 정도까지는 기질과 성격이 우리를 이끌어주는지도 모르겠다
(어찌 됐건 너와 나는 그런 면을 타고났으니까.
우리가 브라반트에서 소년기를 보낸 덕분인지도 모르지.
주위 환경이 우리로 하여금 평범한 아이들보다
더 많이 생각하게끔 만들어주었으니까).
그러나 예술적 감수성이 작업을 통해 계발되고
성숙하게 되는 것은 훨씬 더 뒤의 일이 아닐까.
1882년 10월22일
- <반 고흐, 영혼의 편지>중에서 -
<고갱의 의자 90.7 X 72.5cm . 1888년 12월 . 캔버스에 유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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