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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안중근토마스 순국 100주기, 죽으며 살리라

샬롬이 2010. 3. 26. 13:07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기(1879년 9월 2일 ~ 1910년 3월 26일)를 맞이하였습니다. 조국을 위해 살신성인한 그분의 나이 서른한 살, 참으로 아름다운 청춘입니다. 너무나 아름다워 눈물겨운 청춘입니다. 그분이 민족자존을 위해 자신을 죽였기에 영원히 청춘으로 지금도 삽니다. 역사를 '我와 非我의 투쟁'으로 규정했던 신채호 선생은 이렇게 말합니다. "정신적 국가가 망하면 형식상 국가는 불망하였을지라도 그 국은 이미 망한 국이며, 정신적 국가만 불망하였으면 형식상국가는 망하였을지라도 그 국은 불망한 국이니라."(진용하, <신채호의 사회사상연구>, 한길사, 1984, p.344) 하였으니, 안중근 의사 그분의 절대적 나라는 영원히 존재할 것입니다. 그 역도 성립하다면 나의 나라는 내가 먼저 죽이거나 살린다는 말도 되겠습니다.

 

누군가를 위한다는 것, 더우기 대의를 위해 자신의 생명까지 포기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결단을 요구하는지, 안중근 의사의 삶과 죽음을 보면 그대로 드러납니다.

 

안중근 의사의 순국정신을 기리며 그와 끝까지 함께 했던 분들도 함께 기억합니다. 그의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 김구 선생님, 그의 아내, 영적 신부님...이 땅의 모든 정치인들도 안중근 의사의 진정한 나라사랑의 마음이 무엇인지 사표로 삼았음 하는 바람입니다.

 

제가 여자라서 였을까요, 안중근의사의 어머니께서 아들에게 보낸 편지가 가슴을 칩니다. 또 안중근의사가 '천국에서 만나자'고  부인에게 남긴 편지를 읽을 때는 목이 아픕니다. 나라가 무엇이길래. 나라가 무엇이길래....그분은 대한민국 역사에 인신공희, 제헌해야 했을까 말입니다.

 

안중근 의사를 지사로 키운 건 그분의 어머님이셨습니다. 안 의사의 어머니가 한국인 변호사 선임문제로 진남포의 집에서 평양으로 나가, 천주교당에 머무르고 있을 때였습니다. 당시 일본 경찰과 헌병들이 하루가 멀다하고 찾아와 조 마리아 여사를 괴롭히곤 했습니다. 하루는 일본 경찰 책임자가 “당신의 아들 이토오 공작(이등박문)을 살해하여 두 나라에 큰 변란이 일어났는데, 그처럼 태연할 수가 있느냐? 당신의 자식교육이 잘못된 탓인데 그래도 죄가 없다고 발뺌하겠느냐?”하고 윽박질렀습니다. 그러자 안 의사의 어머니는 “내 아들이 나라밖에서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는 내 알 바 아니다. 그렇지만 이 나라 국민으로 태어나 나라의 일로 죽는 것은 국민된 의무다. 내 아들이 나라를 위해 죽는다면 나 역시 아들을 따라 죽을 따름이다.” 라고 의연히 항변했습니다.  어머니 조 마리아 여사가 여순 감옥에 수감된 아들-안 의사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습니다.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의 편지를 읽다보면 어머니는 자기 아들을 두 번 낳는다는 말이 실감납니다. 몸으로 한 번 낳고, 혼으로 한 번 낳고, 편지의 한 획, 한 획이 커다란 덩어리로 모아지며 묵직하게 가슴에 얹칩니다. 피에타가 따로 없습니다.

 

“응칠(안중근 의사의 아호)아!
네가 이번에 한 일은 우리 동포 모두의 분노를 세계 앞에서 보여준 것이다. 이 분노의 불길을 계속 타오르게 하려면 고등법원에 항소하지 말고 이번에 억울하게 그냥 죽어줘야 한다. 일본 최고 지도자 이등박문을 죽인 너를 일본정부가 살려줄리있느냐? 기왕에 죽을 거면 항소하고, 상고해서 살려고 몸부림하는 인상을 남길 필요없다. 혹시 늙은 에미를 남겨놓고 받아들인 네가 먼저 죽는 것이 동양 유교사상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망설일까봐 일러둔다.”

 

 

이것은 안중근 의사의 감방담당 헌병 지바도시치가 그 편지 내용에 감동하여 자기의 일기장에 기록해두었기 때문에 확인된 자료입니다. 어머니 조여사의 절절한 편지를 받은 안중근 의사는 항소를 포기했습니다. 감형될 수도 있으니 항소하라는 일본인 변호사의 말에 “나는 처음부터 무죄요, 무죄인 나에게 감형을 운운하는 것은 치욕이다.”며 1910년 31세로 의로운 일생을 마감했습니다. 나라를 위해 죽으라고 말하는 어머니의 가르침 이런 어머니들이 있었기에 일제의 어두운 시절에도 안 의사 같은 찬란하게 타오르는 민족의 불꽃들이 있어 우리에게 희망을 주곤 했었습니다. 

 

 안중근 의사가 아내에게 남긴 유서를 읽어 봅니다.

 

우리는 이 이슬과도 같은 허무한 세상에서 하느님의 배려로 배필이 되고 다시 주님의 명으로 헤어지게 되었소. 그러나 머지않아 주님의 은혜로 천당에서 다시 만날 것이오. 주님의 안배만을 믿고 신앙을 열심히 하고, 모친께 효도를 다하시오. 두 동생과 화목하며, 자식의 교육에 힘쓰길 바라오. 심신을 편안히 하고, 후세에 영원한 복락을 희망할 뿐이오. 장남(안중생) 분도를 신부가 되게 하려고 나는 마음을 결심하고 믿고 있으니 그리 알고 하느님께 바치어 장래에 (가톨릭)신부가 되게 하시오. 허다한 말은 후일 천국에서 기쁘게 만나서 상세히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을 믿고 또 바랄 뿐이오.

 

 

 

어느날 몇시 전망 좋은 강가 카페에서 만나자가 아니라, 죽어서 천국에서 만나자고 하는 마지막 편지로군요. 그런데, 안중근 의사 그분의 어머니 그분의 아내 때문에 마음이 이렇게 아픈 것만은 아닙니다.  대한민국 백성이기 때문에 진저리쳐지게 아픈 것입니다.

 

 



 

 

1909년 10월 21일 하얼빈 역,  "그동안 한국 침략의 원흉으로 자주독립권을 무자비하게 박탈한 이토히로부미가 오다니! 이것은 분명히 하늘이 준 기회"라고 생각했다. 블라디보스톡에 있는 대동공보사 주필 이강 동지도 이 사실을 확인해 주었다. 이기회에 이토를 사살하면 일본의 침략정책을 세계에 알리는 좋은 기회가 될 것임을 확신했다

 

안중근은 이 계획을 이곳에 있던 독립투사 정재관, 김서무 등과 논의하고 의병동지 우덕순을 대동, 1909년 10월 21일 하얼빈을 향해 블라디보스톡을 떠났다. 하얼빈은 러시아 동청철도의 종착지인 동시에 정치, 문화 도시이기 때문에 안중근은 하얼빈으로 가면서 러시아어에 능통한 유동하 동지를 대동하고 이튿날 하얼빈에 도착한 후엔 조도선 동지를 영입하여 의거 장소가 두곳으로 나누어 질 때를 대비했다. 그리고 그는 이날 저녁을 이곳 한인사회에서 신망높던 김성백씨 집에서 묵게 되었다.

 

밤새 여러 신문을 모아 이토의 도착시간과 환영절차 등에 관한 정보를 모아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준비해 간 권총과 실탄을 점검하기도 했다. 안중근은 의거를 앞두고 좁은 방 희미한 등잔불 아래서 장차 행할 일을 하나하나 정리해 가면서 끓어오르는 심경을 한시로 쓰고 다시 한글로 한자한자 써 내려갔다.

마침내 1909년 10월 26일 역사적인 의거 시각은 다가오고 있었다 만일을 위해 안중근은 일본의 남만주철도와 러시아의 동청철도가 교행하는 흑룡강과 길림성의 경계에 있는 채가구역에서 이토가 열차를 갈아탈 순간이 의거의 기회라고 생각하고 그곳에 우덕순과 조도선을 배치하고 안중근은 세기적인 역사의 현장을 하얼빈 역두로 잡았다.


 

안중근이 하얼빈역에 도착한 것은 오전 7시경, 일단 역사 안 찻집으로 들어가 동정을 살펴보니 러시아 군인들과 출영객이 역사 안팎으로 들어차 혼잡했다. 이윽고 오전 9시쯤 이토 일행이 탄 특별열차가 플랫폼에 멎었고 마중나온 코코프체프 일행이 열차안으로 들어간 후 그와 일본 총영사의 안내를 받으며 이토와 수행원이 기차에서 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이때 안중근은 이 의거가 국가와 민족을 위해 꼭 성공하게 해 달라는 기도를 하고 찻집에서 나왔다. 이토가 의장대를 사열하고 외국영사단의 출영객들로부터 인사를 받기 시작했고, 안중근은 러시아 군대뒤에서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이토가 안중근과 10보 떨어진 지점에 접어들 찰라, 도열해 있는 군인들 사이로 이토를 겨낭한 안중근의 브루오닝식 권총이 불을 뿜었다. 3발이 이토의 가슴과 흉복부에 명중되어 무어라 몇마디 중얼거리면서 쓰러졌다. 수행의사 고야마가 응급처치를 했지만 곧 절명하고 말았다. 안중근은 본시 이토를 모르기 때문에 여기서 한번 잘못하면 천하대사가 낭패라고 판단, 만전을 기하여 일본인 중에 의젓해 보이는 앞서가는 자들을 향하여 다시 3발을 더 쏘았다. 이토를 뒤따르던 하얼빈 일본총영사 가와카미, 비서관 모리, 만주 철도 이사 다나카 등이 차례로 쓰러졌다.

이때가 오전 9시 30분, 저격 직후 러시아 헌병들이 덮치자 힘에 밀려 넘어지면서 권총을 떨어뜨렸던 안중근은 곧장 일어나 코레아 우라!(대한민국 만세)를 삼창하고 순순히 체포됐다.



 

 

한국에 이어 만주를 삼키려던 일제 하수인 이토 피살에 대한 전보는 일본에서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었으며 온 세계가 떠들썩했다. 동경 일일신문과 대한 매일신보 등의 호외가 나왔고 해외에 망명, 독립운동을 하던 애국지사들은 환호의 찬사를 보냈으나 조정에서는 오히려 친일파들이 당황했다. 중국은 또한 자기들의 원수를 갚은 것처럼 생각하고 크게 기뻐했다.

당시 중국의 국가주석이었던 원세개도 안중근의 의거를 듣고 다음과 같은 글을 지었다.

 

 

 

 

자료는 안중근 의사 기념관 http://www.patriot.or.kr/에서 모셔온 자료들입니다.


 

 

 

 

 

 



자신의 행적을 솔직하고 정확하게 기술하고 그것을 공평하게 평가하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살신구국의 하얼빈 의거를 결행한 안중근의사이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하지만 안중근의사의 이 고귀한 두 유고는 순국 즉시 일제에 압수되어 나라잃은 한민족에게는 물론, 유가족에게조차 알리지 않고 극비 속에 그들의 한국 식민지통치의 자료로만 이용되었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의 영구 비밀이란 없는 법이다. 안중근의사 순국 60년이 지난 1969년 동경 고서점에서 '안중근자서전'일본어 역본이 발견되었고 10년이 지난 1979년 일본국회도서관 헌정자료실 '시치조키요미문서'중에서 '안중근 전기논설'이란 표제가 붙은 책자에서 이 '안응칠역사'의 등사본이 미완의 '동양평화론'과 함께 합철 편책된 채 발견되어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이는 안중근의사가 '사후에 빛을 볼것'으로 생각하였던 소망을 뒤늦게나마 이룬 쾌거가 아닐수없다. 따라서 우리는 안중근의 친필 원본도 어디선가 나타날 것이라는 기대도 가져보는 것이다. 안중근의사는 이 '안응칠역사'를 옥중에서 1909년 12월 13일 기고하여 93일만인 1910년 3월 15일 탈고하였다.

 

 

동양평화론-------------------------



이어서 그는 서양 제국주의 국가들의 침략성과 폭력성을 규탄하면서 그 중에서도 가장 심한 국가가 제정 러시아라고 단정짓고 있다.

이러한 제정 러시아의 진출을 동양에서 막고 물리칠 수 있는 나라는 당시로서는 일본이었고, 그래서 한국 중국의 지도자와 인민들이 일본을 도와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도록 도왔었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갈파하고 있다.

“이 때를 당하여 만일 한국과 청나나 백성들이 일치단결하여 옛날의 원수를 갚으려 하여 일본을 물리치고 러시아 편에 협조하였다면, 일본은 대첩을 거둘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양국의 백성들이 일본 병사를 환영하고 그들의 군수품을 운반해 주고 도로도 닦아주고 적진의 동태를 살펴 보고하는 등의 노고를 아끼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이 승리한 것이라고 하였다. 더욱이 일황이 선전포고 조서에 “동양평화 유지와 대한독립을 공고히 한다” 하고 대의를 밝혔기 때문에 이를 믿고 적극적으로 도와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일제는 러일전쟁의 결과 한국을 탄압하고 만주의 장춘 등 남의 땅을 점거하니 러시아보다 더 심한 만행이었음을 규탄하고 있다. 더욱이 용과 범의 위세를 가지고 고양이 뱀 따위의 행동을 하는 섬나라 일본의 행동에 일침을 가하면서 서세동점의 국제정세 속에서 동양 3국이 뭉쳐서 대적하여야 할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같은 황인종인 이웃나라의 가죽과 살을 벗기고 베어서 차지하려고 하니 이는 어부지리를 서양 세력에게 그대로 주는 것이라고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다.

일본이 한국과 청나라의 영토를 침범, 지배하여 동양평화를 깨뜨린다면 한ㆍ청의 지도자 백성들이 수수방관하지 않을 것을 경고하고 안중근 자신은 먼저 이토 히로부미를 포살하는 전쟁을 솔선수범하는 것이며, 이를 통하여 한국ㆍ중국ㆍ일본의 대표자가 여순구에 모여 평화회의를 개최하자는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지난 갑오년(1894)의 청ㆍ일전쟁을 말할지라도 당시 조선에 쥐 같은 도적배들이 동학당의 소요를 계기로 청ㆍ일, 양국의 병사를 끌어 들이고는, 까닭 없이 싸움을 벌여 서로 충돌케 되었다.” 라고 청일전쟁의 성격을 규정하면서 전란의 원인이 좀도둑 동학당의 소요인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오늘날의 입장에서 볼 때 논란의 여지가 다분히 있으나 당시 안중근은 부친 태훈공을 도와 동학 농민군을 토벌하는 입장에서 동학 농민군의 반란이 곧 외세를 끌어들이는 결과를 가져온 데 대하여 부정적인 입장에서 평가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어서 그는 일본이 승리한 이유와 과정에 대하여 “일본은 유신 이후로 민족이 화목하지 못하고 전쟁이 그칠 날이 없었다. 그러나 외교상의 경쟁이 일어나게 되자 그들 동족간의 불화는 하루 아침에 화해되고 다같이 연합하여 한 덩어리 애국당을 만들어 이같이 개가를 올린 것이다. 이것은 소위 ‘친절한 남이 경쟁하는 형제만 못하다’는 말과 같다” 라고 평양전투와 아산만의 풍도해전에서 승리한 일본군이 압록강 넘어 요동반도와 여순을 함락시켰다. 그리하여 마관조약에 의하여 대만과 요동반도를 할양 받고 2억 원 배상금을 받았으니 일본으로서는 메이지 유신 이후 기념될 만한 사건이라 고 평가했다.

이에 반하여 안중근은 물산이 풍부한 영토와 인구가 수십 배 되는 청국이 패배한 이유가 무엇인가를 반문하면서 “예로부터 청국인은 중화대국으로 자칭하고, 외방을 이적이라 부르며 교만하고 오만하기 이를 데가 없었으며, 더구나 권신이나 척족들이 제멋대로 국권을 농간 하여 백성들의 원한을 맺고 상하가 불화하였으니 이같이 봉변을 당하는 것”이라고 하여 자만과 권위주의, 국론의 분열, 지배계층에 대한 불신, 정치의 문란 등이 전쟁에 있어서 참패를 가져왔다고 분석한다.

3국 간섭에 의하여 제정 러시아가 일본을 견제하면서 청국이 요동반도를 환부 받게 만들어 주면서, 여순 조차를 성공시켜 부동항을 얻기 위한 남하정책의 실상을 비판하고, 그 모든 것이 일본의 청국과의 전쟁 때문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러시아는 불과 수년 사이에 민첩하고 교활한 수단으로 여순을 조차한 후에 군항을 확장하고 철도를 복건 했다. 이런 일의 근원은 생각해 보면, 러시아 사람들은 수 십 년 동안 봉천 이남서 대련 여순 우장 등지에 부동항 한 곳을 억지를 써서라도 가지고 싶은 불 같고 밀물 같은 욕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라고 하면서 러시아의 남하정책 실상을 파헤치고 아울러 “그러나 그 이유를 따져 보면 모두가 일본의 과실이었다. 이른바 구멍이 있으면 바람이 들어오는 격이다. 만일 일본이 먼저 청국을 침범하지 않았다면 러시아도 감히 이런 짓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결국 제 도끼에 발등 찍힌 것이었다.” 라고 청일 전쟁의 역사적 평가를 내리고 있다.

안중근의 입장에서 보면 한국의 독립보장과 동양평화를 위해서 일본이 제정 러시아와 전쟁을 한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며 한국의 주권을 무시 하고 한국인의 의사를 배반한 한국과 무관한 전쟁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전쟁이 일어난 것에 대하여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그 당시 일본은 요행히 연승을 거두었으나 함경도는 아직 거치지 못했고 여순구도 격파하지 못하고 봉천 또한 점령하지 못했던 때였다.

만약 이 때 한국의 관민이 일치단결하여 일어섰다면 을미년(1895) 일본인이 한국의 명성황후를 무고히 살해한 원수를 갚을 수 있었을 것이다. “즉 격문을 사방에 보내고 함경도 평안도 간의 노국 병마와 교통하여 불의에 습격하게 하여 충돌케 하고 청국 또한 상하가 협동하여 전날 의화단 때에 행동했던 것과 같이 하였다면 그들 또한 갑오년(1894)의 숙원(일본군에게 대패함)은 갚았을 것이다.” 라고 하여 한국과 청국이 러일전쟁 중에 일본을 돕지 말고 러시아와 손잡고 일본에 대항하였더라면 동양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다. 그러면서 일본을 상대로 한국과 청국이 서로 다툰다면 이 틈새를 이용하여 영국ㆍ프랑스ㆍ미국ㆍ독일ㆍ이탈리아ㆍ오스트리아ㆍ포르투갈ㆍ 그리스 등이 산동반도 발해만으로 군대를 집결시키면서 위협을 가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어쩔 수 없이 일본ㆍ청국이 대항하게 되고 이에 따라 동양은 자멸할 수 밖에 없다고 설파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전감에서 안중근은 일본 제국주의에 대하여 강한 경종을 주고 있다. “오호라! 자연의 형세를 돌아보지 않고 동종인방을 해치는 자는 끝내 독부의 환을 면치 못할 것이다.”

이는 같은 황인종이면서 한국을 침략하여 지배하려고 한 일본 제국주의의 대륙침략정책을 전면 공격하여 언젠가는 그 값을 치를 것이라고 강하게 논하였다.


 

1910년 2월과 3월에 걸쳐 여순옥중에서 휘호한 안중근 특유의 고귀한 유묵은 200여 폭이 작성되었다고도 한다.
그러나 현재까지 한ㆍ중ㆍ일에 산재되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실물 또는 사진본 등을 합하여 54편이다.

이러한 유물은 남산 안의사 기념관 등 국내 각처에 소장된 24폭의 유묵만이 현재까지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국가보물로 지정되었다. 나머지 30폭은 한ㆍ중ㆍ일에 산재되어 유묵, 혹은 유묵의 영인본으로만 알려져 국가보물로서의 심의절차를 마치지 못한 것이다.

 

 

안중근의사 100주기를 기리는 부족한 이 글, 부모의 길, 아들의 길, 정치인의 길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았음 좋겠습니다.

 

 

 

출처 : 데자뷰(deja vu) & 자메뷰(jamais vu)
글쓴이 : 칼리오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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