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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의 글

한니발 바르카스/베르나르 베르베르

샬롬이 2014. 8. 20. 16:09

 

 

 

 

한니발 바르카스

 

 

/베르나르 베르베르

 

 

 

티로스 왕 피그말리온은 물욕에 눈이 멀어

누이 엘리사의 남편을 죽이고 그들의 재산을 빼앗으려고 했다.

엘리사는 왕에게 불만을 품고 있던 일부 귀족을 데리고 티로스에서 도망쳐 나왔다.

이 페니키아인들은 지중해의 북아프리카 해안에 다다라

새로운 도시 카르타고를 건설했고 엘리사는 디도 여왕이 되었다.

기원전 814년경의 일이었다.

 

 카르타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당대의 가장 부유한 도시가 되었다.

카르타고는 가장 먼저 공화정을 실시한 나라들 가운데 하나이기도 했다.

3백 명의 의원으로 이루어진 원로원에서 

해마다 최고 집정관인 두 명의 수페트를 선출했다.

기원전 3세기에 이르기까지

카르타고는 온 지중해를 지배했다.

 

2백 척이 넘는 카르타고의 배들이 세계 곳곳으로 탐사를 나갔다.

카르타고인들은 막강한 해운 능력을 바탕으로 시칠리아, 사르데냐,

북아프리카 연안, 이베리아 반도에 상관을 설치했고,

북쪽으로는 주석 무역을 위해 스크틀랜드까지 올라갔고,

남쪽으로는 황금 무역을 위해 기니 만까지 내려갔다.

 

이런 사정은 당시 새로운 강국으로 부상하고 있던

로마의 선망을 불러일으키지 않을 수 없었다.

로마인들은 카르타고의 조선 기수를 모방하여

훨신 강력한 병선들을 건조했다.

뱃머리에는 적의 배를 파괴하기 위해 충각을 달았으며,

양쪽 뱃전에는 항해 속도를 높이기 위해 아래위 두 줄로 많은 노를 달고

노예들에게 그것을 젓게 했다.

기원전 264년 시칠리아의 지배권을 놓고

로마군과 카르타고 해군이 맞붙음으로써 제1차 포에니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 전쟁은 기원전 241년 로마 해군이 아이가테스 해전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둘 때까지 계속되었다.

 

카르타고는 명장 하밀카르 바르카스가 분전한 보람도 없이

패배하여 고마와 종전 조약을 맺었으며, 그 대가로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고

시칠리아의 지배권까지 로마에 넘겨주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프리카에서 카르타고의 용병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하밀카르 장군은 병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반군을 진압하는 데 성공했다.

 

하밀카르의 아들 한니발은 기원전 247년에 태어났다.

그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흠모하는 그리스인 가정 교사에게서 교육을 받았고,

제1차 포에니 전쟁이 끝난 뒤에 스페인 정복에 나선 아버지를 따라갔다.

하밀카르 장군이 배신을 당하고 매복에 걸려 전사한 뒤에,

한니발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총사령관이 되었다.

그의 나이 겨우 26세 때의 일이었다.

그는 특유의 카리스마와 조직가의 재능을 발휘하여

카르타고 원로원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베리아 군대를 결성한 다음

로마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기원전 218년 제2차 포에니 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는 병사 수만 명과 코끼리 수백마리를 이끌고

 피레네 산맥을 넘어 갈리아 남부를 통과했다.

그런 다음 적의 예상을 뒤엎고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 북부로 쳐들어갔다.

한니발의 군대를 저지하기 위해 갈리아로 파견되었던 로마군은

적군이 어느새 포 강 유역에 와 있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다.

로마군은 뒤늦게 달려가 적군과 맞붙었다.

이것이 12월에 트레비아 강변에서 벌어진 피아첸차 전투였다.

 

한니발은 눈에 덮인 알프스 산맥의 혹독한 기후를 견디고 살아남은

아프리카 코끼리들을 전투에 활용했다.

로마군은 위압적으로 돌격해 오는 코끼리들 앞에서 줄행랑을 놓았다.

한니발은 용병술의 천재였다.

코끼리들을 전차처럼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기병대의 기동성을 높여 적군의 의표를 지르는 작전을 구사했고

소수 정예병들을 보내어 적의 급소를 치는 <특공 작전>을 펼치기도 했다.

 

캄파니아에서 전투가 벌어졌을 때,

한니발은 병력의 열세를 책략으로 만회했다.

불붙은 나뭇단을 짊어진 황소 떼를 적진으로 몰아간 것이었다.

카르타고는 또다시 승리를 거두었다.

로마는 예비 병력을 모두 파견하여 대항했다.

그리하여 남동부 이탈리아의 칸나에에서 일대 접전이 벌어졌다.

한니발은 기민한 포위 작전을 펼쳐서

병력이 두 배나 많은 로마군을 또다시 섬멸했다.

이탈리아의 많은 도시와 마케도니아, 시칠리아 등이 카르타고 편에 가담했다.

 

로마 시민들은 모든 희망을 잃은 채 함락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런데 한니발은 로마로 진격하지 않았다.

대신 로마의 *딕타토르, 즉 로마를 확실하게 수호할 목적으로

부랴부랴 선출된 특별 집정관과 평화 조약을 맺었다.

로마의 집정관의 위험한 고비를 넘기고 나자

지구전으로 침략자를 지치게 하는 전략을 쓰기 시작했다.

 

카르타고군과 정면으로 충돌하면 로마군이 당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큰 전투를 되도록 회피해 가면서

적에게 빼앗긴 영토를 야금야금 회복해 나가기로 한 것이었다.

카르타고군은 병력이 너무 적었기 때문에

모든 전선에서 버텨 나갈 수가 없었다.

로마군은 이탈리아의 도시들을 하나씩 수복했다.

그 사이에 로마의 스키피오 장군은 스페인에 남아 있던

카르타고군을 완전히 격파하고, 여세를 몰아

카르타고가 있는 북아프리카로 진격했다.

 

 한니발은 이탈리아를 포기하고 위험에 빠진 본국을 구하러 갔다.

카르타고인들은 스키피오와 평화 협상을 시도했다.

하지만 이 협상으 우여곡적 끝에 결렬되고

오늘날의 튀니지 북부에 있던 자마에서 최후의 결전이 벌어졌다.

로마군은 카르타고편이었던 누미디아 기병대를 막판에 매수했다.

기병대도 없이 전투에 임한 한니발은 결국 스키피오에게 참패를 당했다.

 

한니발은 전쟁을 잘못 이끌었다는 비판을 받으면서도

최고 집정관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카르타고를 재건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으며,

귀족의 특권을 폐지하고 재정 개혁을 단행했다.

이런 민주적인 변혁을 좋지 않게 여긴 기존의 특권층은

그를 쫓아내기 위해 로마에 도움을 청했다.

한니발은 로마인들의 추격을 피해

시리아 왕 안티오크스 3세의 궁전으로 피신했다.

마침 로마를 상대로 전쟁을 준비하고 있던 안티오크스 3세는

그를 환대하면서 전쟁의 지휘를 도와 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전략을 둘러싼 그의 조언은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전투는 실패로 돌아갔다.

 

전쟁에서 이긴 로마인들은 평화 협정을 체결하면서

한니발의 축출을 요구했다.

한니발은 소아시아의 왕국 비티니아로 피신하여,

프루시아스 왕을 위해 조직가와 도시 계획가의 재능을 발휘했다.

로마인들은 한니발을 넘겨주도록 프루시아스 왕에게 압력을 가했다.

기원전 183년 더 도망갈 수 없게 된 한니발은

자기 반지 속에 들어 있던 독약을 먹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로마의 역사가 티투스 리비우스는 한니발을 이렇게 묘사했다.

<한니발은 최고의 장수였다.

싸움터로 나갈 대는 앞장을 도맡았고 퇴각할 때는 맨 뒤를 지켰다.

위험에 맞설 대는 누구보다 대담했다.

그는 적게 자고 적게 먹었으며 한시도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흠모했고

대왕에 비견할 만한 기개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포부는 한결 웅대했다.>

한니발은 사후에도 로마의 속박과 소수 지배 집단에 맞선

제 민족의 해방을 상징하는 영웅으로 남았다.

 

 

*로마의 딕타토르는 파비우스 막시무스 쿨크타토르를 가리킨다.

한니발이 그와 평화 조약을 맺었다는 것은 정사(正史)에 기록된 사실이 아니다.

한니발은 칸나에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뒤로 그 기세를 몰아

로마로 진격할 수도 있었는데 그러지 않고 제2의 도시 카푸아에서 그해 겨울을 보냈다.

왜 그랬을까? 베르베르는 이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패배자의 관점에서 역사적 상상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