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우스트>/괴테
제 2 막
- 높고 둥근 천장의
비좁은 고딕식 방 -
옛날 파우스트의 방에 조수였던 바그너가 박사가 되어 앉아 있다.
메피스토펠레스는 혼수 상태인, 파우스트를 안쪽에 뉘었다.
(전의 파우스트의 방, 변한 것이 없다)
메피스토펠레스
(막 뒤로부터 걸어나온다.
그가 막을 들치고 뒤를 돌아다 볼 때,
파우스트가 구식 침대 위에 누워있는 것이 보인다.)
여기 누워 있거라, 풀기 어려운
사랑의 인연에 유혹당한 불행한 친구여!
헬레나한테 마취당한 자는,
쉽게 정신을 차릴 수 없지.
(주위를 둘러 보면서)
위를 보아도, 여기를 보아도, 저기를 보아도,
조금도 변하지 않았고 상하지도 않았다.
채색한 유리창은 전보다 탁해진 것 같고
거미줄이 많아졌다.
잉크는 굳어버렸고, 종이는 누렇게 바래졌다.
그러나, 모든 것이 제자리에 그대로 놓인 체로구나
파우스트가 악마에게 몸을 판다는 증서를 쓴 펜조차도
이곳에 그대로 딩굴고 있다.
그뿐인가, 이 깃털 펜대(77) 속에,
내가 속에서 뺏은 피 한 방울이 들어 있다.
이런 하나 밖에 없는 진귀한 것을 얻게 해서,
훌륭한 수집가를 기쁘게 해주고 싶다.
저 낡은 털옷도 녹슨 못에 걸려 있다.
저것을 보니, 언제가 소년에게 가르쳐준
그 장난이 생각난다.
그 녀석은 청년이 되었어도
아직도 그 말을 되씹고 있을 테지.
털이 복실복실한 가죽 외투여,
너한테 감싸여, 세상이 당연한 일로 생각하는 것처럼,
다시 한 번 대학 교수가 되어
뽐내고 싶어지는구나.
학자이면 당연히 바라는 노릇이지만,
악마는 그런 것과는 오래 전에 인연을 끊었지.
(털외투를 내려서, 터니까,매미, 딱정벌레,
나방들이 튀어나온다)
곤충들의 합창
어서 오세요! 어서 오세요!
옛날의 은인(78)이시여!
우리들은 날으며 노래하며,
당신을 전부터 알고 있지요.
당신은 날몰래 하나씩
우리들을 옮겨 주셨지요.
우리들은 수 천으로 붙어서
춤을 추며 나왔어요. 아버지.
가슴 속의 개구장이는
열심히 숨어버리지만,
이는 털 속으로부터
재빨리 기어나와요
메피스토펠레스
이 젊은 생물들이 뜻밖에 나를 기쁘게 하는구나.
씨를 뿌려 두면, 언젠가 추수하게 된다.
낡은 털옷을 다시 한 번 털면,
또 한 마리씩 여기저기 툭툭 튀어나온다.
뛰어올라라! 기어다녀라! 구석을 향해
어서 숨어라, 귀여운 놈들아.
낡은 상자가 있는 곳으로,
고동색이 되어버린 양피지 속으로,
저 해골의 훤하게 뚫린 눈 속으로도.
이런 잡동사니와 곰팡이가 핀 물건들 속에는,
언제나 변덕스런 벌레가 있어야지.
(털옷을 쑥 끼어 입는다)
자, 내 어깨를 다시 한번 감싸다오!
오늘은 내가 또다시 주인이다.
그러나 이렇게 되어도 소용이 없지.
나를 알아줄 인간은 어디에 있길래!
(그는 초인종의 끈을 잡아당긴다.
날카롭고 귀청을 찢는 듯한 소리가 울린다.
그때문에 건물이 흔들리고 문이 탁하고 열린다)
조수
(길고 어두운 복도를 비틀거리며 걸어온다)
이게 무슨 소린가! 이게 웬 집울림인가!
계단이 뒤흔들리고, 벽이 진동하는구나.
덜커덩거리는 색유리창으로,
번쩍이는 번개가 보인다.
현관 마루에 금이 가고, 천장에서는
석회와 흙덩이가 벗겨져 쏟아진다.
굳게 빗장을 질러둔 문이
이상한 힘으로 열렸다.--------
아, 저건 무시무시 하구나! 거인이
파우스트 선생님의 낡은 털옷을 입고 서 있다.
저 눈초리, 눈짓을 받는다면,
나는 털썩 주저 앉을 것 같구나.
도망쳐야 할까? 서있어야 할까?
아아, 나는 어찌 된 것인가!
메피스토펠레스
(눈짓하며)
여보게, 이리로 오게!------
자네 이름은 니코데무스지.
조수
그렇습니다. 선생님!--------
기도(79)라도 드릴까요?
메피스토펠레스
그만두게!
조수
참 반습니다! 저를 아시다니.
메피스토펠레스
잘 알고 있네.
나이는 들었어도 아직 학생이군.
이끼가 낀 학생! 학자는 그런 식으로
연구를 계속하는 걸세. 별 도리가 없으니까.
그렇게 해서 소박한 종이집(80)을 세우지.
그러나 가장 훌륭한 학자라고 해도
완전히 세우지는 못하네.
하지만, 자네의 선생, 그 사람은 능한 사람이야.
위대한 바그너(81) 박사를 모르는 사람은 없지.
지금의 학계의 제1인자일세!
학계를 통괄하여
날마다 학문을 증진시키는 분일세.
지식욕이 왕성한 청강자들이,
그의 주위에 떼를 지어 모여오네.
그만이 강단에서 빛을 내고 있지.
성 베드로처럼 열쇠(82)를 자유로히 사용하여
땅위의 것이건 하늘의 것이건 열어서 보여주지.
그는 무리 위에 뛰어나게 빛나고 있으니까,
어떤 명성도 명예도 견줄 수 없지.
파우스트 박사의 이름조차 희미하게 되는 판국이니까.
독창적 재능을 발휘한 자는 그이 뿐일세.
조수
죄송합니다만, 선생님, 이런 말씀을 드리면,
일부러 이의(異議)를 다는 것 같습니다만.
말씀하신 것은 일체 문제가 안됩니다.
겸손이 바로 그분의 천성입니다.
그 위대하신 분이 이상하게 자취를 감추신 일을,
선생님은 단념할 수 없어서,
그분의 귀환만이 위안이며, 행복이라고 기대하고 계십니다.
방도, 파우스트 박사께서 계시던 때 그대로,
손도 대지 않고 그분이 떠나신 후,
옛 주인을 계속 기다리고 계십니다.
지금 성시(星時)(83)는 어느 때일까요?--------
벽이 겁을 먹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문설주도 뒤흔들리고 빗장도 벗겨 졌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선생님도 들어오실 수 없었겠죠,
메피스토펠레스
자네의 선생은 어디 가셨나?
나를 선생한테 데려가거나 그분을 이리로 모셔오기나 하게.
조수
난처합니다. 엄격하게 금지되고 있어서.
그렇게 해도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선생님은 대사업 때문에 수 개월이나,
조용하게 파묻혀 지내고 계십니다.
귀에서 코까지 새까맣게 검정칠을 하시고,
불을 입으로 부시기 때문에 눈이 빨갛게 충혈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이제나 이제나하고 성과를 고대하고 계십니다.
불집게의 달가닥거리는 소리가 음악입니다.
메피스토펠레스
내가 들어가는 것을 거절할리가 있나?
나는 그의 성공을 촉진하는 사람일세.
(조수, 퇴장. 메피스토펠레스 점잖하게 앉는다)
내가 앉자마자,
저 뒤쪽에 낯익은 손님이 오는군.
그러나 저사람은 최신학파에 속했으니까.
한정없이 거만하게 굴 거야.
(복도를 허둥지둥 달려온다)
대문도 방문도 열려 있구나!
이제 겨우 지금까지와 같이
산 사람이 죽은 사람처럼
곰팡이 속에서 시들고, 썩어서,
산 채로 죽어가는 것 같은 일도, 없어질 것 같다.
오늘은 이상한 기분이구나!
이곳은 벌써 오래 전에,
겁을 먹고 가슴을 조이며,
철모르는 애숭이 학생으로서 왔던 곳이 아니냐?
그리고 그 수염 털석부리들을 밀고,
그 허튼 소리를 감지덕지 듣던 곳이다.
저게 뭐냐?-------저 안쪽 방에
어둑한 곳에 여전히 앉아 있구나!
가까이 가저 보니, 이건 놀랐다.
저 작자는 아직도 그 고동색 털옷을 입고 있다.
그대는 내가 아직 철이 없어서 그랬지만,
오늘은 그렇게는 안될 걸.
이거 노선생님, 레에테의 탁한 흐름이,
갸우뚱하신 그 벗어진 머리를 잠그지 않았다면,
여기 옛날 학생이 대학의 채찍 따위를 벗어나서,
이렇게 찾아온 것을 환영해주십시오.
선생님은 옛날 그대로이시군요!
저는 딴 사람이 되어왔습니다.
메피스토펠레스
초인종 소리에 자네가 와주었으니 기쁘이.
나는 그때에도 자네를 경시하지 않았다네.
애기벌레, 번데기도, 그것이
장래에, 아름다운 나비가 될 것을 보여주지.
자네는 과감하고 씩씩하게 보이지만,
다만 절대주의자(84)가 되어 집으로 돌아가지는 말게.
학사
노선생님! 우리들은 옛 장소에 있지만,
혁신된 시대의 추세를 생각하셔서,
분명치 않은 말씀은 삼가주십시오.
선생님은 선량하고 성실한 소년을 우롱하셨습니다.
그때는 아무 기술도 부리지 않고 성공하셨지만,
오늘은 감히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메피스토펠레스
젊은이에게 바른 진실을 말하면
주둥이가 노란 것들이 아주 싫어하거든
그러나, 점점 해를 거듭하여,
그것을 하나하나 자신이 절실하게, 맛보게 되면,
자기 머리에서 그것이 나온 것처럼.뽐내고,
그 선생은 바보였다고 한다네.
학사
아마 교활했다고 하겠지요!-------
왜냐하면 우리들에게,
직접 진실을 말하는 교수가 없기 때문이죠
어는 교수든지, 보탯다가 뺏다가,
어떤 때는 정색하고, 어떤 때는 쾌활하고
약싹빠르게, 철모르는 아이들을 상대합니다.
메피스토펠레스
물론 배우는 데에 시기가 있지.
자네는 스스로 가르칠 준비가 다 된 것 같군
세월이 흘렀으니,
제네도 풍부한 경험을 쌓았겠지.
학사
경험이라고요!
그따위는 거품아니면 쓰레기지요.
정신하고는 비교가 안됩니다.
솔직히 말씀하시죠! 인간이 안다는 것은,
전혀 알 만한 가치조차 없는 것이지요------------?
메피스토펠레스
(사이를 두었다가)
나도 벌써부터 그렇게 생각했네,
나는 바보였지.
점점 더 천박하고 어리석다고 느끼네.
학사
매우 반가운 말씀이군요!
분별있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성적 노인을 만난일은 이것이 처음입니다!
메피스토펠레스
나는 숨은 황금을 찾으러 나가서.
소름끼치는 석탄을 걸머지고 온 셈일세.
학사
자, 솔직하게 말씀하세요
선생님의 두개골과 대머리도,
저 해골이상의 가치는 없지요?
메피스토펠레스
(상냥하게)
여보게 자네는 자신이 얼마나 거칠은지 모를테지?
학사
독일어로는 지나친 겸손은 거짓과 통한다고 하죠.
메피스토펠레스
(자기가 앉아있는 바퀴가 달린 의자를 점차
무대 앞쪽으로 밀고나와, 관람석의 관중을 향해)
이 높은 곳에서는, 눈이 어지럽고 숨이 막힐것 같습니다.
여러분 틈으로 피난시켜 주시겠습니까?
학사
시대에 뒤떨어지고, 이제는 아무 가치조차 없는데,
자기는 유익한 인간이라고 생각하다니 큰 잘못이지요.
우리 청년들이 세계의 절반을 정복하는 사이에,
당신은 무엇을 했습니까?
인생은 삼십(85)을 넘어서면
이미 죽은 가나 마찬가집니다.
당신 따위는 적당한 때에 때려 죽이는게 상책일거요.
메피스토펠레스
이렇게 되면 악마는 할 말이 없다.
학사
내가 원하지 않으면 악마도 존재할 수 없지요.
메피스토펠레스
(외면하고)
그 악마가 이제 네놈의 다리를 걸어 쓰러뜨릴게다.
학사
이것이 청년들의 가장 고귀한 천직입니다.
세계란 것은, 내가 만들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소.
당신들을 세속적 옹졸한 사상의 속박에서
해방시킨 것은 내가 아니고 누구였소?
한편 나는 자유롭게, 명성이 말하는 대로,
기꺼히 자기 속의 빛을 추구하고 있어요
그리고 비길 데 없는 환의에 잠기면서,
광명을 가슴에 안고, 흑암을 등지고, 전진합니다.
(퇴장)
메피스토펠레스
건방진 놈아, 뽐내며 전진해봐!---------
우둔한 일이건, 현명한 일이건,
옛 사람이 생각하지 못한 것을,
누가 생각할 수 있을가보냐?
그것을 깨달으면, 너는 매우 고민할 거다.
하지만 저런 녀석이 보다 안전하지.
수 년이 지나면, 딴 사람이 될 테니.
포도즙은 아무리 굉장한 거품을 낸다고 해도,
결국은 역시 포도주가 된다.
(갈채하지 않는 관람석의 젊은 구경꾼에게)
자네들은 내 말에 냉담하지만,
착한 애들이니까 그대로 두네.
잘 생각하게 악마는 늙은이니까.
악마를 이해하려거든, 나이를 먹어야 하네!
<주>
(77) 펜대 : 거위 깃털로 만든 것이다.
(78) 은인 : 옛날 메피스토펠레스가 이 털옷을 입었을 때
이 벌레들을 얿겨 놓았다.
(79) 기도라도..: 무서운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80) 종이집 : 공허한 지식의 체계를 뜻한다.
(81) 바그너 : 박사 제 1부에서 파우스트의 조수였다.
(82) 열쇠를...: 신약성서 마태복음 16장 19절 참조.
"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 (마 16:19)
(83) 성시 : 점성술(占星術)에 의하면 시간은 별에 지배된다고 한다.
(84) 절대주의자 : 체험을 경시하고 새색에만 의존하는 사상가.
(85) 三십을 넘어서면..: 괴테의 저서에 (얼간이 30세를 넘으면
명예를 위해, 세상을 위해 죽는 것이 좋다)는 말이 있다.
(86) 성운이 좋은 때 : 주 (83) 참조
(87) 인간을..: 인간을 화학적으로 만들려는 생각이 중세 말기에 있었다.
(88) 결정(結晶)으로 : 정신적 요소가 결핍된 인간을 의미한다.
1975년1월15일에 발행된(값 900원) 괴테의<파우스트)를
1980년에 구입했다고 나의 책에 적혀있고
잊지않고 이름을 한문으로 새겨 넣어
주인임을 밝혀 친구에게 빌려 줘도
도로 찾으려는 욕심(?)이 보였다.
"인생이란? 바보가 지껄이는 소리"라는 연필로 쓴
깨알보다 조금 큰 글씨체가 젊은 나를 본다.^^*
정독하지 못하고 두었다가 빛이 누렇게 바랜 마음으로
한 밤중에 괴테를 만나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작은천사의 바보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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